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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주보칼럼 ) 예수 행렬 vs. 장례 행렬 (3/9)

패인초 2025. 3. 9. 09:40

예수 행렬 vs. 장례 행렬

(2025.3.9. 조인 목사)


 

미국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소위 장례 행렬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보통 공동묘지(cemetery)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경우, 우선 묘지 내의 예배실(chapel)에서 발인식을 거행한 후에 고인의 시신이 담긴 관을 실은 영구차나 혹은 관을 든 사람들이 앞서고 그 뒤로 유족과 조문객들이 줄지어 하관하는 장소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때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묘지 밖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때는 일반 도로에서도 묘지까지 이동하는 긴 차량 행렬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나 보안회사 직원들이 장례 차량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호등을 조작하면서 장례 행렬을 에스코트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소위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 풍습이 있습니다. 상여(喪輿, bier)는 시신을 담은 관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여(輿)는 수레나 가마를 뜻하는바, 고려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상여는 처음에는 바퀴가 달려 사람들이 수레처럼 끌었으나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람들이 어깨에 메는 상여로 바뀌었습니다. 현대의 한국에서는 상여와 그 뒤를 따르는 무리의 행렬을 거의 볼 수 없는데, 그나마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상여는 어깨에 메기에 너무 무겁고 장지도 먼 경우가 많기에 상여처럼 꾸민 영구차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여조차 백정과 노비와 같은 천민은 사용할 수 없었음을 볼 때, 사람은 죽어서도 차별을 받는 것 같습니다.

 

나인이라는 마을에 사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는데, 죽은 아들을 위한 장례식의 광경이 마치 한국의 상여 행렬과 닮았습니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7:12)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수레조차 없었는지 마을 사람들은 관을 어깨에 메고 장지로 향했는데, 이때 남편과 함께 외아들마저 잃은 여인과 마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여를 따르는 이 장례 행렬은 마주 오는 예수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7:11)

 

장례 행렬과 마주친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고 명하시자 관 속에 누워 있던 청년은 일어났고, 장례 행렬은 해산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은 언젠가 다시 죽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청년을 다시 살리신 사건은 성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인간은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실 때 다시 살아나되, 육체적 부활만 아니라 영생을 얻습니다. 이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행렬밖에 없습니다. 장례 행렬 속에 끼여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과부와 외아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 행렬 속에 끼여 생명을 향해 걸어갔음을 기억할 때, 사람은 죽어서도 차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