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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주보칼럼) 추수감사절과 미국 (11/24)

패인초 2024. 11. 24. 09:24

추수감사절과 미국

(2024.11.24. 조인 목사)

 

미국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20년 9월 29일 영국의 청교도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약 2개월간의 항해 끝에 대서양을 건너 1620년 11월 20일 미국의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 불리던 이들 101명(남자 72명, 여자 29명) 청교도의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서양의 높은 파도와 비바람, 좁은 배에서의 갑갑한 생활, 부족한 식량, 질병 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으며, 특히 육지에 도착한 이후에는 원주민의 침략으로 인해 더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청교도는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서양을 건넜습니까?

 

16세기 초 영국에서는 로마교회의 교황 대신 영국의 왕이 교회를 지배하는 영국국교회(=성공회)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메리 1세 여왕이 다시 로마교회로 복귀하면서 ‘피의 메리’답게 개신교도, 특히 청교도를 극심하게 핍박하자 이들은 스위스나 네덜란드 등으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하자 청교도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성공회를 지지하는 여왕은 이들의 입국을 금했으며, 그녀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역시 소위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내세워 모든 국민에게 영국 국교만을 믿도록 강요하면서 청교도를 핍박했습니다. 이에 청교도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는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질병, 그리고 원주민의 위협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고향인 영국의 지명을 따라 명명한 현재의 보스턴 근방의 ‘플리머스’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621년 3월 드디어 원주민과 상호 협력 및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원주민으로부터 농사법을 배워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드디어 그해 가을 옥수수와 보리, 밀 등을 수확함으로서 신대륙에서 첫 곡식을 추수한 청교도는 하나님과 원주민에게 감사하기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잔치를 벌였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지킨 최초의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이후 1789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국가적 기념일로 선포했으며, 1863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매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고, 1941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이 당시 남북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과부와 슬픔과 고통을 겪는 자들을 위로하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자는 의미로 추수감사절을 선포했다면, 이날은 단지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 분명합니다. 한편 목숨 걸고 신앙의 자유를 찾은 청교도를 생각할 때, 오늘날 신앙의 자유가 너무 충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는 미국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