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관포지교
(2024.6.23. 조인 목사)
단짝 친구가 외진 산길을 걷다가 잠시 쉬던 중 수풀 사이로 반짝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한 친구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금덩이가 하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금덩이를 주워서 다른 친구에게 가져와 보여주자 다른 친구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니, 이건 금이 아닌가! 우리는 이제 횡재했구려.” 그러나 금덩이를 주운 친구는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라고 하지 말게. 금을 주운 사람은 나니까.” 어색해진 두 친구는 다시 길을 나섰는데 뒤에서 금덩이를 잃어버린 산적들이 쫓아오자 금덩이를 가진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걸 어쩌나! 이제 우린 죽게 생겼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시게. 금덩이를 주운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그러나 포숙은 달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던 관중과 함께 장사했을 때 몰래 더 많은 수익금을 챙긴 그에 대해 집안이 가난하니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는 포숙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포숙은 관중이 벼슬에서 쫓겨날 때마다 아직 그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오지 않았다며 사람들에게 그를 칭찬했으며, 관중이 전쟁터에서 도망갔을 때도 그에게는 돌봐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라며 그를 감쌌습니다. 또한 관중과 포숙은 훗날 각각 모시는 주군이 달라 서로 적이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포숙의 주군이 관중을 죽이려 할 때도 포숙은 주군을 설득하여 관중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게 했으니 춘추시대 단짝 친구였던 관포지교(管鮑之交) 우정의 끝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나바는 포숙을 닮았습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바울의 회심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그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소개했으며, 자기 고향인 다소에서 3년 동안 칩거하던 무명의 바울을 데려다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이때부터 단짝 친구가 되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로부터 함께 선교사로 파송 받아 1차 선교여행까지 무사히 마쳤지만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던 중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도중에 선교를 포기했던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으나 바울은 이에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크게 다투다가 마침내 헤어졌고, 각자의 방식으로 선교했습니다.
바나바가 관용주의자라면, 바울은 원칙주의자인데, 성경은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바나바는 마가와 선교했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선교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훗날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 화해했음을 볼 때(딤후4:11; 몬1:24), 하나님은 관용주의자와 원칙주의자를 모두 사용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나라의 주군이 포숙을 관중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을 때 관중은 포숙의 원칙주의 때문에 반대했던바, 바나바도 바울의 원칙주의 때문에 서운했을까요? 그러나 바나바에게는 바울은 최소한 금덩이 때문에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관중처럼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를 세상에 낳아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세상에서 나를 알아준 사람은 바나바(포숙)이다.” 관포지교의 우정이 그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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